주력 의류보다 신발 매출이 오히려 많아지자 본사는 윤윤수에 주목하고 그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제안을 합니다. 휠라코리아를 설립할 테니 연봉 160만달러를 받는 사장을 맡아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 직장인들의 역사를 다시 쓰는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휠라코리아는 전 세계 휠라 법인 중 1위를 차지합니다. 당시 휠라의 회장이었던 에리코 프레시는 이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휠라가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지만 꽃을 피운 곳은 한국입니다. 이렇게 윤 사장은 능력을 인정받아 당시 샐러리는 최고 수준인 연봉 18억원을 받게 됩니다. 한 달 평균 1억5천만원, 하루 평균 500만원이니 시간당 62만원을 버는 셈이었죠.
윤윤수는 97년에는 자서전을 냈지만 제목은 제가 연봉 18억원을 받는 이유였어요. 그는 책을 내게 된 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시 국세청에서 소득세를 많이 낸 사람의 순위를 발표했습니다. 재벌가가 아닌 부자로는 저만 순위에 포함됐고 그래서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이 책을 통해 셀러리맨도 성실하게 노력하면 고소득자가 될 수 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윤윤수 휠라코리아 대표 이야기 : 회사를 사버린 샐러리맨 목차
1. 윤윤수 회장의 어린 시절 이야기
윤윤수의 인생의 절반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100일도 안돼 돌아가셨고, 농사꾼인 아버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폐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울대 의대에 원서를 냈지만 떨어져서 아쉬워서 재수를 시작합니다.
아침에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형이 서울 근교에 있어서 그곳에 머물렀는데 눈치가 보여 이리저리 방랑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시험을 봤는데 서울대 의대는 또 떨어졌대요. 다행히 마지막으로 지원한 서울대 치과대학은 합격했어요. 꿈에도 그리던 캠퍼스에 왔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의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결국 대학은 휴학하고 서울대 의대.에게 세 번째 도전장을 던집니다.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 위해 이 지원도 쓰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서울대 치과대학에 복학할 수 있었지만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아 후기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수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 윤윤수 회장의 카투사와 20대 시절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발생합니다. 1학년 기말고사에서 친구들의 부정행위에 억울하게 휘말려 정학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라도 공부하기 위해 카투사에 입대하였고, 여기서 읽힌 영어 실력은 이후 가장 든든한 밑천이 되었습니다. 영어를 더 많이 배우려는 욕심에 미군들을 붙잡고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다던데요. 음식을 사주고 대신 보초를 서주기도 했답니다.
부대 내에서는 그를 보고 배알도 없는 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 배웁니다. 결국 제대할 무렵 그의 영어 실력은 미국인들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대학 복학 이후에는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교관을 꿈꾸며 외무고시를 준비하여 1차 합격합니다.
하지만 나이 때문에 어린 후배들과 경쟁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아 포기했다고 합니다. 결국 서른 살이 넘어서야 대학 졸업장만 손에 쥔 채 사회에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그의 20대는 줄곧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3주 만에 들어온 대학, 다시 1년 정악으로 동기생에 비해 4년이나 늦어버렸습니다. 서른 살에 대학 졸업장을 받고 취업문을 두드렸지만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의 인생을 보면 항상 실패만을 해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진해운에 도전했고 영어실력 덕분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정적이지만 도전적이지 않은 분위기, 제한적이고 사소한 직무는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무역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상사회사 이력서를 수백 장 썼는데 역시 나이 때문에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오라는 곳은 신입사원으로 들어오는 조건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동기들이 이미 과장이 된 시기라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3. 취업과 샐러리맨으로 성공하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유통업체인 JC페니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됩니다. 무려 6개월이 넘는 채용 절차 끝에 국내 최고의 무역회사에 다니던 사람들을 제치고 합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의 업무는 한국 상품을 구입해서 미국 본사로 보내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정신없이 일하던 어느날 미국 본사로 출장을 가게 됩니다. 그때 바이어 한 명이 일본 회사보다 싼 가격에 전자레인지를 납품받으면 좋겠다고 한마디 했대요. 윤윤수는 국내에 돌아와 이 말을 잊지 않고 국내 전자업체와 협상을 하려 했지만 싸늘한 반응만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자레인지가 뭔지도 몰랐고 생산라인은 당연히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삼성전자가 관심을 보여왔고 일본보다 대당 100달러 낮은 가격을 제시합니다. 미국 바이어들은 이지안을 신경 쓰면서도 한국의 생산능력을 믿지 않았어요. 결국 바이어가 한국으로 직접 날아와 두 눈으로 삼성 공장을 보고 OK 사인을 했다고 합니다. 이는 큰 성공을 거두면서 수출어계에는 윤윤수라는 이름의 글자가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신발회사 화승의 임원으로 스카우트 되었습니다. 화승의 신발 브랜드에는 르까프와 프로월드컵이 있습니다. 윤윤수는 수출부장 직책을 맡아 미국 시장에 신발을 팔러 갔고 이곳에서 휠라를 만나게 됐습니다. 당시 휠라는 우리 분야에서 꽤 알려진 브랜드였어요. 이를 본 윤윤수는 세련된 이미지인 휠라 브랜드로 신발을 만들어 팔면 된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신발 사업을 생각하고 라이선스를 딴 사람이 있었습니다. 훗날 그의 중요한 파트너가 될 호모 아르티스였습니다. 결국 아이디어는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아쉬움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또 바쁘게 일하던 어느 날 다시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가 아이디어를 낸 수출권이 저작권 문제에 발목이 잡혀 회사에 80만달러의 손해를 입히게 됐다고 합니다. 결국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는 죄책감에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40대 과장님은 다시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4. 휠라와의 만남
그리고 과거 아쉬움 속에 들어갔던 휠라를 생각하며 무작정 볼티지로 날아가 휠라의 신발 라이선스를 갖고 있는 아르티스를 만났습니다. 윤윤수는 아르티스를 끈질기게 설득해 한국 신발에 휠라 상표를 붙일 수 있게 됐습니다. 이렇게 한국에서 만들고 휠라 상표를 붙인 신발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력 의류보다 신발 매출이 오히려 많아지자 본사는 윤윤수에 주목하고 그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제안을 합니다. 휠라코리아를 설립할 테니 연봉 160만달러를 받는 사장을 맡아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 직장인들의 역사를 다시 쓰는 순간이었습니다.
1991년 휠라코리아가 설립되었을 때 윤윤수는 사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설립 이듬해 15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했고, 이후 6년간 매년 50%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는 등 성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제품을 기획하고 아이템 별로 소량 생산해 시장 반응을 본 뒤 잘 팔리는 제품만 집중한 결과였다고 합니다.
결국 휠라코리아는 전 세계 휠라 법인 중 1위를 차지합니다. 당시 휠라의 회장이었던 에리코 프레시는 이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휠라가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지만 꽃을 피운 곳은 한국입니다. 이렇게 윤 사장은 능력을 인정받아 당시 셀러스는 최고 수준인 연봉 18억원을 받게 됩니다. 한 달 평균 1억5천만원, 하루 평균 500만원이니 시간당 62만원을 버는 셈이었죠.
97년에는 자서전을 냈지만 제목은 제가 연봉 18억원을 받는 이유였어요. 그는 책을 내게 된 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시 국세청에서 소득세를 많이 낸 사람의 순위를 발표했습니다. 재벌가가 아닌 부자로는 저만 순위에 포함됐고 그래서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이 책을 통해 셀러리맨도 성실하게 노력하면 고소득자가 될 수 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5. 휠라코리아의 성공
2000년대 휠라는 제품 개발에 과도하게 투자했다가 마케팅에 실패해 적자에 빠지고 부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윤 사장은 본인이 직접 인수하고 싶었지만 문제는 4억5천만달러이라는 인수자금이었습니다.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휠라, 재팬, 휠라, 브라질 등을 설득해 로열티를 선지급받는 방식으로 3억달러를 마련하고 내부 투자자들도 설득해 자금을 조달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집을 포함한 전 재산가 주변 사람들의 돈을 모두 긁어모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20007년 윤윤수는 휠라의 본사를 인수하면서 정상에 오르게 됐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휠라가 한국에 공헌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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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 당시 , 6천만달러의 적자를 2010년에는 흑자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과감한 브랜드 리뉴얼이었습니다. 중년감의 중후한 브랜드 이미지를 제거하고 밀레니얼 세대를 공략합니다. 90년대 인기를 끌었던 디자인을 재해석해 만든 보호폰을 위한 신발에 10~20대가 열광했습니다. 특히 97년도에 출시된 신발을 재해석해 딥슬러터2를 출시했는데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출시된 지 2년도 안 돼 국내에서는 180만 켤레가 해외에서는 820만 켤레 등 총 1000만 개가 판매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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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미국의 신발 전문지 '후데어 유스'는 이 신발을 올해의 신발로 선정했습니다. 또 다른 휠라의 성공 비결에는 골프공 제조사 액슈넷 지분을 확보한 것도 작용했습니다. 액슈넷은 세계 1위의 골프강 브랜드 타이트리스 보유 회사로 양호한 실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윤윤수 회장은 무일푼 직장인으로 출발해 글로벌 브랜드 휠라를 인수하는 재계의 거물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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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