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마케팅은 과거부터 존재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어 광복 이후에는 정부가 주도하여 진행했었죠. 실제 박정희 정부는 애국 마케팅을 강조했는데 국산품 애용이라는 표어가 곳곳에 붙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공권력을 이용하여 외제품 사용을 단속하기도 했죠. 그리고 이러한 마케팅은 90년대 외환위기 때 절정을 맞이합니다. 이 시기 많은 기업들이 애국 마케팅에 편승했는데 815콜라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오늘은 코카콜라의 견제를 받을 정도로 잘 나갔던 815콜라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애국 마케팅 제품 815콜라의 성장과 몰락 이야기 목차
1. .코카콜라의 성장과 정책
이야기 시작합니다. 콜라는 현재 인류의 문화 식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음료이며 매일 7억잔이 팔려나간다고 하죠. 심지어 코카콜라에 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경쟁 상대는 다른 음료가 아니라 물이다." 음료 시장에서는 독보적인 일이지만 전체 물 시장에서는 고작 3%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코카콜라의 역사는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미국의 약사인 존 팸버턴이 코카이카 카페인을 함유한 두통약을 만들게 되었는데요. 이것이 코카콜라의 시작이었죠. 이 음료는 그가 운영하는 약국에서 잔당 5센트로 판매되었지만 판매량은 좋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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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약재 시장에 나서 캔들러는 이 음료에 대한 제조 판매 등 모든 권리를 단돈 100만 원에 샀다고 하죠. 그는 코카콜라 컴퍼니를 설립했고 이후 콜라는 미국을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죠. 그리고 콜라가 해외 시장을 공략하는 방법은 단순했습니다. 우선 현지 업체와 보틀링 계약을 맺고 시장에 진입 이후 적당한 시점의 계약 중단 압력을 통해 현지 업체를 인수하는 것이었죠. 코카콜라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경영인 우드로파의 원칙 중 하나도 해외 지사 계약 시 기간을 명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파트너는 한양, 우성, 호남, 그리고 범양이었습니다.
2. 범양식품의 콜라독립 시도
1995년 코카콜라는 그들 방식대로 일방적인 계약 해지를 통보 다들 10개를 들며 코카콜라에 인수되었지만 범양식품은 반기를 들었습니다. 비록 중소기업이었지만 20년 넘게 콜라를 만들어 왔으니 직접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던 거죠. 여기에 더해 그동안 담당하는 지역인 대구 경북 그리고 충청 지역의 유통망을 믿었다고 합니다. 사실 음료 시장은 유통망을 얼마나 장악하고 공급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는데 범양은 이 같은 기반을 이미 갖춰 놓은 셈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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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자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20년 넘게 한 곳에서 장사를 하면서 대리점과의 친밀도가 매우 강했습니다. 국산 콜라를 내더라도 이 지역에서는 새로운 거래처를 뚫을 필요가 없었던 거죠. 이 정도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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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98년 폴라 독립의 슬로건으로 815콜라가 출시됩니다. 815콜라가 출시된 시점은 외환위기로 많은 국민들이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대기업들이 문을 닫거나 해외 자본에 넘어가고 있었고 많은 국민들은 정리해고와 취업난에 시달리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죠. 이에 따라 당시만 해도 국산을 애용하고 토종 해사를 밀어주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즉 국민들에게 애국 마케팅이 강력한 호소력을 얻고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출시된 815콜라는 애국 마케팅을 적극 활용했는데요. 이름부터가 815 광복절을 떠올리게 했죠.
3. 애국 마케팅과 815 콜라
tv나 신문 광고에서는 해외 자본에 맞선 제품이라는 점을 크게 강조했습니다. 모델로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판유걸 배우 최종원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98년 8월 15일 광복절에는 이른바 콜라 독립 전쟁 이벤트를 열고 판촉 사원을 독립군으로 칭하는 등 상당히 노골적인 애국 마케팅을 했습니다. 이 마케팅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집회나 시위 현장에는 늘 815콜라가 옆에 있었다고 하죠. 이뿐 아니라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815콜라를 마시는 것이 곧 애국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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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격 또한 저렴했습니다. 과거에는 코카콜라에 로열티를 주고 제품을 공급했지만 815콜라는 로열티를 줄여 공급 단가를 낮출 수 있었죠. 실제 초기 815콜라는 한 상자당 2천 원 정도 저렴했다고 합니다. 결국 출시 이듬해 점유율 13.7%까지 차지하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코카콜라 펩시로 양분된 콜라 시장에서 이 같은 약재는 경악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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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815콜라의 전성기였죠. 엄양식품 관계자는 당시 소비자들의 반응은 정말 뜨거웠어요. 대부분의 기업들이 외환위기 여파로 현금 유동성에 차질을 빚던 시기였지만 우리는 현금이 남아돌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범양식품이 외친 콜라 독립은 현실로 다가온 듯 했습니다.
4. 815 콜라의 몰락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죠. 글로벌 거대 기업인 코카콜라의 벽은 높았고 시장은 냉혹했습니다. 먼저 경영진의 판단 착오가 있었습니다. 815콜라는 저가 브랜드에서 벗어나 고가 전략을 택했는데요. 두 차례에 걸쳐 가격 인상을 했습니다. 소비자들의 입맛이 어느 정도 길들여졌다고 판단하여 가격을 올려도 소비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죠. 여기에 더해 815콜라의 성장의 위기 의식을 느낀 코카콜라는 대규모 물량 공세와 할인 공세를 본격화합니다. 결국 코카콜라 815콜라의 판매 가격이 거의 비슷해진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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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가장 중요한 맛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콜라를 생산할 때는 톡 쏘는 맛을 좌우하는 탄산가스량이 매우 중요한데요. 범양식품은 이를 고정시키지 못하고 계속 조절하면서 맛의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실제 815콜라는 구입처에 따라 맛이 달랐다고 하죠. 많은 사람들은 별로 차이 나지 않는 가격이면 굳이 왜 이걸 마시냐라는 반응이 많았다고 하죠.
5. 애국 마케팅의 한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소비자들의 애국 정서도 차츰 시들해지기 시작합니다. 2천년대 들어 경기가 상당 부분 호전되었고 지나친 애국 마케팅에 소비자들은 실증을 느꼈습니다. 결국 호카콜라와 가격은 유사하지만 맛은 떨어지는 815콜라는 외면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점차 매장에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고 2004년 생산을 중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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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5년 3월 범양식품은 파산 선고를 받고 쓰러지게 되었죠. 이후 815 콜라는 변화를 여러 번 시도했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애국 마케팅은 외환위기나 월드컵 같은 전국적 이벤트가 발생하는 상황이라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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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가장 중요한 건 제품의 품질과 적절한 가격이죠. 815 콜라는 이 중 그 어느 것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초반에 반짝한 뒤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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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2024.02.26 - [분류 전체보기] - 소버린 자산운용과 SK 최태원 회장이 경영권을 잃을 뻔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