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화장품 광고계를 새롭게 써내려 간 아모레퍼시픽은 우리나라 화장품의 역사 그 자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오늘은 아모레 퍼시픽의 역사와 재미있는 사실들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1954년에는 회사에 사운을 걸고 대규모 투자를 당시 보기 드문 자동화 시설로 대규모 공장을 설립했죠. 그러나 엄청난 투자로 인한 자금난으로 망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다행히 무사히 위기를 넘기며 더욱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 그룹의 역사 이야기 : 창업과 성장 목차
1. 이영애와 아모레 퍼시픽 광고
2. 아모레퍼시픽의 창업.
3. 태평양화학공업사의 창업과 성장
1. 이영애와 아모레 퍼시픽 광고
1990년대 초반 배우 이영애는 화장품 광고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산소 같은 여자를 강조한 태평양의 마몽드 광고였죠. 이 광고가 화제였던 건 이영의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90년대 초반의 시대상을 잘 반영했는데 당시 여성의 사회 전출이 늘어나면서 여성들은 보다 능동적이고 독립적으로 변화하던 시기였죠. 마몽드는 나의 세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광고의 카피는 '결혼이 목표는 아니다', '성취는 남자의 것만이 아니다', '나의 삶은 나의 것'과 같이 당시 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했습니다. 약 20편에 달하는 cf 속에서 이영애는 형사 외신 기자 구조원 등으로 업무에 몰두하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도 했죠. 이영애는 시간이 흘러 인터뷰에서 나의 20대 시절을 모조리 마몽드 cf에 쏟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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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태평양의 광고가 인기를 끌자 경쟁사에서도 유사한 광고를 내기 시작합니다. 럭키 드봉 화장품에서는 박주미가 카레이서로 등장하기도 했죠. 그러나 아모레 퍼시픽의 광고가 매번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0년 동안 마몽드의 얼굴이었던 이영애의 다음 모델은 허준의 예진아씨로 큰 인기를 끌던 황수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황수정은 대형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마몽드의 이미지까지 추락했죠. 이후 박주미, 한가인, 한지민이 마몽드 전속 모델을 거쳤습니다. 이때는 이영애가 나온 광고와는 다르게 청순하면서 투명한 이미지를 강조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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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2년 소녀시대 유리를 내세운 광고는 시청자들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명품백이 갖고 싶을 땐 남친을 사귄다는 광고는 많은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여성을 남자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그리는 등 민감한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었죠. 오히려 20년 전 이영애가 출연한 광고가 훨씬 진보적인 광고로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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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태평양의 광고로 인기를 끌었던 이영애는 2006년부터 lg 생활건강의 전속 모델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화장품 광고계를 새롭게 써내려 간 아모레 퍼시픽은 우리나라 화장품의 역사 그 자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오늘은 아모레 퍼시픽의 역사와 재미있는 사실들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2. 아모레퍼시픽의 창업
이야기 시작합니다. 우리 회사의 모태는 나의 어머니다. 우리 회사는 여성이 키운 기업이다. 창업자 서성환 회장이 입버릇처럼 말했던 내용입니다. 때문에 회사의 역사를 보려면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죠.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송아는 개성에서 성장하며 가네 수공업으로 화장품을 제조하던 어머니의 가업을 이어받았습니다. 그의 모친은 당시 여성의 머리를 가꾸는 데 필요한 동백기름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품질이 무척 뛰어났기에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졌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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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환은 원료를 구매하는 일을 맡았는데 개성에서 서울 남대문까지 1,800키로를 자전거로 왕복했다고 합니다. 이후 개성에 문을 연 김재현 백화점에서 화장품 코너를 오픈하여 판매까지 맡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백화점에서 그의 아내가 될 변금주 여사가 일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곱상한 얼굴과 성품을 기준으로 취업한 백화점 판매원들은 그야말로 신여성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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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의 재미를 알아가던 것도 잠시 날벼락 같은 증명 통지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1945년 1월로 일본이 패망하던 해였죠. 전쟁터로 끌려간 그는 중국의 황량한 병원에서 힘겨운 훈련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지만 중국에 있던 그는 중국이 일본으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은 뒤에야 풀려났습니다. 그날은 1945년 9월 5일이었고 이날이 태평양의 창립 기념일이 되었죠. 이에 대해 그의 아들 서경배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대회장은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전의 일은 진정한 창립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다. 강제로 끌려간 전쟁터에서 제대하며 진정한 자유를 찾은 날을 창립 기념일로 선언한 것이었죠.
3. 태평양화학공업사의 창업과 성장
이후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태평양화학공업사를 세웠습니다. 태평양만큼이나 큰 기업을 만들고 태평양을 건너 세계로 진출하겠다는 뜻이었다고 하죠. 처음으로 출시한 제품은 메로디 크림 이 제품은 뛰어난 품질은 물론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고난이 다가왔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의 피난 열차에 몸을 실어야만 했죠. 성아는 피난길에도 원료를 가지고 갈 정도로 화장품에 무서운 집착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남성용 헤어 크림 에이비c 포마드를 출시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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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의 영향으로 긴머리를 포마드로 정도하는 헤어스타일이 유행하던 때였습니다. 기존 제품이 가지고 있던 뻣뻣한 머릿결 번들거림의 문제점을 보완한 제품이었죠. 얼마나 인기가 높았던지 제품이 집하장에 닿자마자 도매상들이 물건을 모두 인수해 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954년에는 한국 최초의 연구실을 만들며 연구개발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연구실을 만드는 출시된 abc 100번 크림 또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합니다. 이번에는 회사에 사운을 걸고 대규모 투자를 당시 보기 드문 자동화 시설로 대규모 공장을 설립했죠. 그러나 엄청난 투자로 인한 자금난으로 망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다행히 무사히 위기를 넘기며 더욱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